이야기/글

2019년 3월 2일 사랑의 편지

1919년3월1일 대한제국 전역에서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외치는 독립선언서 낭독과 독립만세 삼창 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습니다. 이 운동은 한 달 뒤에 김구를 중심으로 해서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제국 임시정부를 수립케 하기도 했습니다. 해외의 다른 나라들에게 대한제국의 상황을 알리고 자주독립을 외치는 운동이면서 동시에 국내적으로 전국민이 일본의 식민지배에 항거해서 일제히 일어난 국민 봉기 운동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민족은 어려운 시기마다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서 백성들이 대동단결하여서 항쟁하고 밑으로부터의 저항운동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그러했고 더 멀리는 몽골의 침략 때도 그러했습니다.

지금부터 100년 전에 우리민족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거부하며 독립운동을 결사적으로 벌였습니다. 이 중심에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종교를 떠나서 민족의 미래를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이 운동에 참여했습니다.

3.1운동 100년을 맞이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들에게는 역사적인 과제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100년 전에 민족의 암울한 역사 앞에서 온 백성이 마음이 하나가 되었듯이 100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도 여전히 민족의 역사적 과제 앞에서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민족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는 명제는 자주 독립을 외쳤던 당시의 우리조상들의 마음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분단의 아픔을 이겨내고 마침내 통일을 이루고 민족 번영의 미래를 꿈꾸며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에게는 역사적인 사명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에스더가 페르시아제국의 왕비가 된 것은 유대민족을 구하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 때를 위하여 그녀가 왕비가 되었다는 모르드개의 역사인식이야말로 우리들에게 지금 이 때를 위하여 우리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 같습니다. 100년 전에도 우리 조상들은 해외에 흩어져 있던 수 많은 사람들이 대한의 독립을 위해서 애쓰고 피흘렸다는 것을 기억하며 지금 우리들도 이 때를 위하여 이 곳에 있음을 기억해 봅니다.

지금 우리들은 더 이상 분열하지 말고 우리 민족의 미래와 복음의 전파를 위해서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2019년 2월 24일 사랑의 편지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3장18-19절)

사랑이 무엇일까요? 사랑은 조건없이 좋아하고 헌신하고 모든 것을 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은 모순적일 때가 많습니다. 조건이 있고 모든 것을 내어주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랑에 울고 사랑에 속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사랑이 조건적이고 모순적이다고 해서 참된 사랑을 기대하지 않거나 포기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왜곡된 사랑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참된 사랑은 우리를 평안하게 하고 회복시켜 줍니다. 사랑은 놀라운 치유력이 있습니다. 회복이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다함이 없습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바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고 우리가 거짓과 어둠 가운데 약함과 모순 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죄의 값을 우리를 대신하여 치루시고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조건없고 완전한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그 사랑 안에 용서와 회복과 치유와 새생명이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자는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참 사랑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충만해 집니다. 우리가 갈증을 느끼고 자꾸만 관계의 문제와 삶의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참 사랑 안에 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요한복음15장9-11절)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다함이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안에 있으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2019년 2월 17일 사랑의 편지

눈이 내렸습니다. 눈덮인 세상을 바라보면 참 아름답습니다. 그렇게 복잡하고 때로는 더러웠던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이면서 하얗게 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도 하얗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눈이 녹으면 더러웠던 것들이 씻겨나가기도 하고 다시 드러나기도 하면서 온통 세상이 얼룩져 보입니다. 원래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눈 덮인 세상이 꼭 우리들의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우리는 흔히 민낯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화장하지 않고 꾸미지 않은 얼굴의 모습을 표현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원래 모습을 감추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이 드러나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꾸미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원래 모습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의 은혜의 눈이 덮고 있어야 하얗게 보입니다. 그렇지만 은혜가 눈이 녹듯이 사라지면 온갖 더럽고 추한 모습들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들의 마음을 가득 덮어야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마음이 은혜가 사라지고 마음이 메마르기 시작하면서 내 속에 있던 추한 모습, 생각, 말, 행동들이 막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모습에 대해서 두 가지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사람은 변한다, 혹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사람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변하지 않는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가 덮이게 되면 새롭게 보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계속해서 덮여 있으면 하얀 모습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가 사라지는 순간 원래의 내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고 포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덮어서 내가 하얗게 보여야 합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며 그 은혜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오직 주의 은혜로 지금 여기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그것의 항존성입니다. 항상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계가 없습니다. 그 어떤 것도 덮을 수 있고 감쌀 수 있습니다. 은혜 안에 있으면 나는 없어지고 주님만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이 은혜의 신비입니다. 그 은혜가 나를 있게 합니다.

2019년 2월 10일 사랑의 편지

카이로스 훈련을 받고나서…

1월의 마지막 주간(28일-2월1일)에 카이로스 훈련을 받았습니다. 여러분들의 권유가 있었지만 미뤄오다가 훈련이 시작되기 전주 금요일에 마음으로부터 성령님께서 카이로스 훈련을 받도록 인도하시는 것을 느끼고 곧바로 신청을 해서 한 주간 훈련을 받게 되었습니다.

카이로스(Καιρός , Kairos)는 그리스 헬라어로서 시간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시간을 나타내는 헬라어 단어가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두 단어가 있는데 전자는 일반적인 시간을 나타내고 후자는 어느 특정한 때를 나타내는 단어로 쓰입니다.

카이로스 훈련은 하나님의 때를 알고 그 뜻을 따라 어떻게 복음의 증인으로서 순종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를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결단하게 하고 순종하게 하는 훈련을 말합니다.

선교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시는 분이 아니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인도하시며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부르신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교회를 섬길 때에도, 이민목회로 부르실 때에도, 밴쿠버로 인도하실 때에도 하나님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가지고 나를 부르셨습니다. 단지 내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훈련을 하면서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면 보이는 곳만큼만 나아가라’ 순종의 힘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생각하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카이로스 훈련이 선교훈련으로서 완전한 훈련은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을 다시 돌아보게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을 확인케 하고 거기에 다시 포커스를 맞추게 하기에는 안성맞춤인 맞춤형 훈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특별히 교회를 섬기고 계시는 평신도 지도자들에게는 강력하게 추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 훈련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바는 운동성(Movement)입니다. 그러므로 주변으로 계속해서 퍼져 나가는 운동이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퍼져 나가는 것이 Movement가 되어야 건강한 능력을 계속 유지하듯이 카이로스 훈련은 퍼져 나가야 하는 운동입니다. 그리고 그 운동의 리듬을 따라서 복음의 역사도 강력하게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2019년 2월 3일 사랑의 편지

씨감자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다음해 농사를 위해서 남겨놓은 감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먹을 것이 부족하게 되면 씨앗으로 심기 위해서 남겨놓은 감자까지 다 먹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 때 그 씨감자를 다 먹어 버리면 내년에는 농사를 지을 수가 없기 때문에 전부가 굶어 죽게 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절대 씨감자는 먹지 않습니다. 그것을 남겨 두어야 내년에 다시 농사를 짓게 되고 풍년이 들면 더 많은 씨감자를 남기게 되고 그것은 더욱 많은 수확을 거두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삶에는 반드시 필요한 필수양식과 여분으로 남게 되는 잉여양식이 있습니다. 그 남은 부분은 다음을 위해서 심겨져야 합니다. 그런데 남겨야 할 잉여분을 다 사용하게 되면 다음에는 심을 것이 없어서 꼭 필요한 부분에 부족하게 됩니다.
헌금생활도 같은 원리가 적용이 됩니다.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고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게 됩니다.(고린도후서9장6절,10절 참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일용할 양식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 이외의 것은 내가 다시 심어야 하는 씨앗과 같이 심어야지 내가 먹고자 하면 그것은 먹을 수 없게 되고 썩게 됩니다. 만나가 그러했습니다. 만나는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나 그 만나를 더 많이 거두어 저장해두지만 그것은 썩어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많이 거둘 능력이 있으면 작게 거두는 자에게 주면 됩니다. 그러면 많이 거두는 자나 작게 거두는 자나 모두 부족함이 없게 됩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리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하나님이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둘째, 내게 주신 복이 내게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 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 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린도후서8장14-15절)고 했습니다. 복은 흘러가야 합니다. 고이면 썩게 되고 복이 화가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복을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이 헌금입니다. 그러면 더 많은 복을 받게 됩니다. 이것이 심고 거둠의 원리입니다. 이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2019년 1월 27일 사랑의 편지

지난 주 목요일(24일) 저녁에 기독교 세계관 대학원에서 교민들을 대상으로 문학강좌를 개최하였습니다. 강의를 하신 교수님은 김응교 교수님(숙명여대)이었습니다. 강의 제목은 ‘윤동주가 사랑한 것들’입니다.
윤동주 시인은 27세의 청년으로 일본의 강목에서 순교했습니다. 해방이 되기 불과 5개월 전이었습니다.

序詩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르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
거러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서시 원문)

 

윤동주 시인의 ‘서시’에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윤동주 시인이 사랑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윤동주의 작품을 평전한 김응교 교수는 윤동주가 사랑했던 것을 8가지로 정리했습니다.

  1. 변두리를 사랑했습니다. (진리와 참된 스승은 변두리로부터 나옵니다.)
  2. 나를 사랑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달라진다는 의미입니다)
  3. 고아, 과부, 난민을 사랑했습니다.
  4. 사라져가는 한글을 사랑했습니다.
  5. 일하는 사람들, 여성노동자, 복선철도 노동자들을 사랑했습니다.
  6. 슬퍼하는 사람들, 환자들을 사랑했습니다.
  7. 행복한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8. 하늘을 바라보는 항일성(向日性)으로 절대자를 사랑했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자가 아니라 진리로 살아가는 삶을 보여준 윤동주 시인이 우리민족의 조상이며 선배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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